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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 (오호 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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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진은 오호 십육국 시대에 강족 출신 요장이 건국한 국가이다. 383년 비수대전 이후, 요장은 전진의 부견에게 반기를 들고 384년 대선우, 만년진왕을 자칭하며 후진을 건국했다. 요장 사후 아들 요흥이 즉위하여 동진을 공격하여 낙양을 점령하고 서진을 멸망시켰으며, 후량 등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북위와의 전쟁과 혁련발발의 하나라 자립으로 국력이 쇠퇴했고, 417년 동진의 유유에게 멸망했다. 후진은 불교를 장려하여 맥적산 석굴 등 많은 불교 유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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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 (오호 십육국) - [전쟁]에 관한 문서
일반 정보
토착 이름}}
통용되는 긴 이름진(秦)
일반 이름후진(後秦)
시대해당 없음
지위제국
정부 형태군주제
수도장안(長安)
국가 모토해당 없음
국가해당 없음
공용어해당 없음
종교해당 없음
통화해당 없음
역사
건국384년
멸망417년 9월 20일
사건요장(姚萇)의 황제 칭칭
날짜386년
사건하련발발(赫連勃勃)의 반란
날짜407년
이전전진(前秦)
이전서연(西燕)
이전후량(後凉)
이후하(夏)
이후동진(東晉)
지도자
지도자 1요장(姚萇)
통치 기간 1384년–393년
지도자 2요흥(姚興)
통치 기간 2394년–416년
지도자 3요홍(姚泓)
통치 기간 3416년–417년
직책황제
통계
현재중국(中國)
지도
404년의 후진
404년의 후진

2. 역사

383년 비수 대전에서 전진의 부견이 패배한 후 화북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강족 출신의 요장은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부견의 처벌을 두려워하여 위수 북방의 말목장으로 도주, 384년대장군, 대선우, 만년왕(萬年秦王)을 자칭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후진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요장은 관중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전진의 부견과 전쟁을 벌였다. 385년 서연에 의해 장안이 함락되자 요장은 장안을 탈출한 부견을 체포하여 살해하였다. 386년 서연이 장안을 버리고 이동하자 요장은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때 진주에서 부등이 전진의 잔존 세력들을 통합하여 관중의 패권을 놓고 요장과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다.

393년 말, 요장이 병사하자 태자였던 요흥이 뒤를 이었다. 요흥은 요장의 죽음을 틈타 쳐들어온 부등을 격파하고 그를 살해하여 오랜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후 숙부인 요서(姚緖)와 요석덕(姚碩德)의 보좌를 받아 관중을 평정하고 세력을 확대하였다. 399년에는 동진을 공격하여 낙양을 점령하고 한수와 회수 이북의 지역들을 장악하였으며, 400년에는 서진을 멸망시켰다. 401년에는 후량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남량·북량·서량을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직후 북위와 분쟁이 일어나 402년에는 시벽(柴壁)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양주의 패권을 잃었다. 이후 북위와 중립적인 관계를 회복한 후진은 403년에 다시 양주를 공격하여 후량을 멸망시키고 남량·북량·서량을 다시 속국으로 삼았다. 405년에는 후구지를 복속시켰으며 407년에는 남연을 속국으로 삼았다.

405년 말, 동진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한수 유역의 12개 을 반환하도록 요청하자 요흥은 유유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것을 승낙하였다. 이듬해에는 남량의 확장에 밀려 양주를 상실하였으며, 407년에는 혁련발발의 하나라가 자립하여 후진은 오랜 전쟁에 돌입하였다. 후진은 하나라와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였으며 이로 인해 409년에는 서진이 독립하였으며 동진과도 지속적으로 대립하여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다.

414년 이후에는 후계자 분쟁으로 혼란에 빠져 후진의 국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마침내 416년에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요흥은 이 반란을 진압한 직후 사망하였다. 요홍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국내의 혼란은 계속되었으며, 이를 틈타 동진의 유유가 북벌군을 일으켜 쳐들어왔다. 요홍은 북벌군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았으나 내분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며, 417년에는 장안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

2. 1. 건국 배경

강족은 중국 서북방에 살던 이민족으로 후한 때부터 중국으로 이주하여 옹주 일대에 거주하였다. 오호 십육국 시대에 들어와 요익중, 요양, 요장 등이 차례로 수령이 되어 전조, 후조, 동진, 전진 등의 용병으로 중국 각지를 전전하였다. 383년 전진의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화북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요장은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부견의 처벌을 두려워하여 위수 북방의 말목장으로 도주, 384년 대장군, 대선우, 만년왕(萬年秦王)을 자칭하며 후진을 건국하였다.

요(姚)씨는 후한 시대에 창궐했던 소당의 후손으로, 강족의 난이 평정된 후 남안군 적정(현재의 감숙성정서시농서현 서부)으로 이주하여 남안적정강이라 칭했다. 삼국 시대 말기, 족장 요가회는 등애를 따라 263년 촉(촉한)을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워 진서장군·수융교위·서강도독을 받았고, 4세기 초 아들 요익중이 부를 계승했다.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이 흉노의 한(후의 전조)에게 함락되자, 312년 요익중은 남안에서 풍익군으로 옮겨 호서강교위·옹주자사·부풍공을 자칭하며 약화된 서진으로부터 자립했다. 이때 자신의 성을 한인풍의 "요씨"로 했다.

서진 멸망 후 장안에 도읍을 정한 전조는 323년 진안의 난을 평정하고 관농 일대를 평정했다. 요익중도 전조에 항복하여 평서장군·평양공에 봉해져 풍익에서 농상(감숙성진안현 일대)으로 옮겨졌다. 329년 전조가 후조에 멸망되자 요익중은 후조에 항복하여 안서장군·육이 좌도독에 임명되었다. 333년 후조의 초대 황제 석륵이 죽자 후조 국내는 동요했고, 장안에서 일족 석생이 반기를 들었다. 요익중은 석생의 난에 참여했지만, 같은 해 토벌군에 패배하여 강부는 청하군 섭두(하북성청하현 부근)로 이주했다.

349년 3대 황제 석호가 죽자 화북은 혼란에 빠졌고, 요익중도 섭두에서 반자립 상태가 되었지만 후조에서 우승상·친조왕을 받아 명목상 후조 정권 하에 있었다. 351년 후조가 염민에 의해 멸망되자, 요익중은 동진에 복속을 표명했다.

352년 요익중이 73세로 사망하자, 5남 요양이 부를 계승했다. 요양은 본거지인 관중으로 돌아가려 섭두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향했지만, 후조에서 자립한 여러 세력에 막혀 대패하여 동진 영내로 도망쳐 초(안휘성박주시초성구)로 옮겨졌다. 요양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 동진 위정자들에게 경계받았다. 353년 동진의 은호북벌을 감행하며 요양에게 칼날을 겨눴다. 요양은 북벌군을 요격하여 대파하고, 동진 내부로 쳐들어가 수도 건강 북쪽 강변까지 육박했다. 이 사이에 요양은, 염위를 멸망시키고 하북을 평정했던 전연에 복속했다.

355년 요양은 대장군, 대선우를 자칭하고 북쪽으로 돌아가 허창(허난성허창시 동)에 거점을 두었다. 356년 환온의 북벌을 받아 대패하여 평양(산서성임분시)까지 도망쳤다. 요양은 관중으로 돌아가려 군을 재정비, 357년 용문진(호구 폭포 부근)에서 황하를 건너 행성(산서성황릉현 부근)으로 진격하여 관중에 할거하던 전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요양은 전진군에 연패하여 삼원(산시성삼원현)에서 사로잡혀 살해당했다.

요양이 패사하자, 동생 요장은 부를 이끌고 전진에 항복했다. 전진의 영주 부견은 요장을 중용했고, 요장은 전진의 남향 원정(366년), 약양 토벌(367년), 전연 원정(370년), 전구지 원정(371년), 익주 원정(373년), 전량 원정(376년), 양양 원정(378년)에 종사하여 많은 공적을 세웠다. 383년 전진이 비수 전투에서 동진에 대패하자 배하의 이민족이 잇따라 자립, 급속도로 와해하기 시작했다. 384년 요장은 전진으로부터 자립한 서연모용홍 토벌에 패배하여 부견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위북의 마목장으로 도망쳤다.

2. 2. 요장 시대

383년 비수 대전에서 전진의 부견이 패배한 후 화북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요장은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부견의 처벌을 두려워하여 위수 북방의 말목장으로 도주, 384년대장군, 대선우, 만년왕(萬年秦王)을 자칭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후진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요장은 관중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전진의 부견과 전쟁을 벌였다. 385년 서연에 의해 장안이 함락되자 요장은 장안을 탈출한 부견을 체포하여 살해하였다. 386년 서연이 장안을 버리고 이동하자 요장은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때 진주에서 부등이 전진의 잔존 세력들을 통합하여 관중의 패권을 놓고 요장과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다.

후진 건국 당시


384년, 위북의 마목장으로 도망친 요장한족천수군 윤씨 등의 협력으로 맹주가 되어 대장군, 대선우, 만년진왕을 칭하고 백작 원년으로 건원했다. 후진 성립 당시, 관중에서는 전진과 서연이 격렬하게 다투고 있었고, 아직 세력이 약했던 요장은 서연에 인질을 보내 종속했다. 385년, 서연은 전진의 수도 장안을 함락시키고 전진의 주력을 거의 궤멸시켰다. 요장은 장안 이북의 각지를 차례로 점령하고, 같은 해 장안에서 도망치던 부견을 살해했다. 386년, 장안에 할거하고 있던 서연은 내란을 연발시키고 모용개가 백성 40만 명을 이끌고 관중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장안 일대의 관중 지역은 공백 상태가 되었고, 요장은 힘들이지 않고 장안에 거점을 두었다.

386년, 요장은 장안을 상안으로 개칭하고 이곳을 후진의 도읍으로 정하고 황제위에 즉위했다. 같은 해, 전진의 잔존 세력도 포한(감숙성임하현)에서 즉위한 부등에 의해 통합되었다. 부등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관중 각지의 전진 잔존 세력을 모아 후진을 포위했다. 특히 진령 일대의 양정, 행성의 부찬, 고평의 파다란부 세력은 후진에게 위협이었다. 후진은 각지에서 전진군에게 패배를 거듭하고 387년에는 안정과 상안의 두 도시만 남게 되었다. 부등군의 진영에는 부견의 상이 놓여 있었고, 싸움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상 앞에서 복수를 맹세했다. 또한, 병사들은 팔에 "죽어서 쉰다"라고 문신을 새기고 살해한 후진군 병사를 먹는다는 처절한 짓도 했다고 전해진다.

389년, 후진은 대계에서 전진군의 주력을 크게 격파하고(대계의 싸움), 이 이후 전진군의 대규모 공세는 사라졌다. 요장은 관중 각지에서 전진에 대해 우세를 점했지만, 부등도 훌륭한 외교로 후진 포위망을 유지했다. 393년, 요장은 병세가 악화되자 후사를 아들 요흥에게 맡기고 사망했다.

2. 3. 요흥 시대

393년 말, 요장이 병사하자 태자였던 요흥이 뒤를 이었다. 요흥은 요장의 죽음을 틈타 쳐들어온 부등을 격파하고 그를 살해하여 오랜 전쟁을 종식시켰다.[3] 이후 숙부인 요서(姚緖)와 요석덕(姚碩德)의 보좌를 받아 관중을 평정하고 세력을 확대하였다.[3] 399년에는 동진을 공격하여 낙양을 점령하고 한수와 회수 이북의 지역들을 장악하였으며[3], 같은 해에 천왕으로 칭호를 변경했다. 400년에는 서진을 멸망시켰다.[3] 401년에는 후량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남량·북량·서량을 속국으로 삼았다.[3]

그러나 그 직후 북위와 분쟁이 일어나 402년에는 시벽(柴壁,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양분현 서남쪽 분하 동쪽 기슭의 시장(柴庄)에 있었다)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양주의 패권을 잃었다.[3] 이후 북위와 중립적인 관계를 회복한 후진은 403년에 다시 양주를 공격하여 후량을 멸망시키고 남량·북량·서량을 다시 속국으로 삼았다.[3] 405년에는 후구지를 복속시켰으며[3] 407년에는 남연을 속국으로 삼았다.[3]

요흥은 유교를 옹호하여 유명한 유학자들을 초청하여 장안에서 가르치게 하고, 학업을 원하는 학생들이 수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시에 그는 불교의 열렬한 신자였으며 자신의 국가에서 종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401년, 구차의 승려 구마라습을 궁정으로 맞아들여 그를 매우 존경했으며, 그는 산스크리트어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중요한 번역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또한 승려 법현399년 후진에서 인도로 불교 경전을 얻기 위해 장안을 떠난 것도 요흥 치세 때였다. 요흥은 다양한 사찰과 탑을 세웠으며, 맥적산 석굴의 건설은 그의 치세에 시작되었고, 기록에 따르면 후진 인구의 약 90%가 불교를 실천했다.

맥적산 석굴


406년경의 후진

2. 4. 쇠퇴와 멸망

405년 말, 동진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한수 유역의 12개 을 반환하도록 요청하자 요흥은 유유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것을 승낙하였다. 이듬해에는 남량의 확장에 밀려 양주를 상실하였으며, 407년에는 혁련발발의 하나라가 자립하여 후진은 오랜 전쟁에 돌입하였다. 후진은 하나라와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였으며 이로 인해 409년에는 서진이 독립하였으며 동진과도 지속적으로 대립하여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다.

414년 이후에는 후계자 분쟁으로 혼란에 빠져 후진의 국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마침내 416년에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요흥은 이 반란을 진압한 직후 사망하였다. 요홍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국내의 혼란은 계속되었으며, 이를 틈타 동진의 유유가 북벌군을 일으켜 쳐들어왔다. 요홍은 북벌군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았으나 내분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며, 417년에는 장안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

416년경 후진

3. 문화

후진은 불교를 장려하여 많은 사찰과 석굴이 조성되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초당사, 기공사장별(記功賜將莂, 386년), 여헌묘표(呂憲墓表, 402년), 여지묘표(呂他墓表, 402년), 부씨여정정조상(苻氏女靜貞造像, 407년) 등이 있다. 이 시기 기년문서(紀年文書)로 투르판 문서 1점이 존재한다. 천수 맥적산 석굴에는 후진 시대의 석불이 남아있다.

4. 역대 군주

사당호시호이름재위 기간연호
태조무조요장384년~393년백작(白雀) 384년~386년
고조문환요흥394년~416년황초(皇初) 394년~399년
--요홍416년~417년영화(永和) 416년~417년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2] 서적 Zizhi Tongjian
[3]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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